시즈오카시의 세이켄지(淸見寺)에서 할아버지의 편액과 대면
우호의 역사에 감동

4월1일 서울 경복궁을 출발하여 5월21일까지 51일간을 걸었다. 원시인처럼 1151km를 두발로 걸었다. 얼굴은 봄바람과 강렬한 햇볕으로 구릿빛을 띄고, 발바닥은 물집 투성이 됐다. 발을 끌며 카와사키(川崎)에 도착했다.

우리가 치켜든 깃발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그려져 있다. 깃발의 의미를 생각했다. 어느 시인이 깃발에 대해 정의를 말했다. 깃발은 소리없는 외침이라고.

그대로일 것이다. 한반도 8천만명과 일본의 1억2천만명의 평화와 우정과 사랑의 염원이 압축된 그림을 깃발로 삼았다. 고작 양국 50여명의 대원이 서울에서 도쿄까지 걸어왔다는 것 뿐일지도 모르지만 한국 국민의 대표이자 일본 국민의 대표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15년 전부터 조선통신사가 걸어온 옛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이유는 나의 11대 조부(여우길=呂祐吉)의 필담창화 편액이 일본의 세이켄지(시즈오카시 시미즈구=淸水區)라는 사원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단순히 11대 조부가 임진왜란 후에 회답 겸 쇄환사로서 일본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50살이 지나서야 업적을 이해했다

내 나이가 40을 지나 50을 넘었을 때 귀가 열리고 조선통신사의 업적을 알게 됐다. 조부의 흔적을 찾아 조부의 발자취를 쫓아 그 길을 걸어야겠다... 일본의 세이켄지에 정사, 부사, 종사관의 칠언절구 시 3편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는 사실을 부산문화원에서 나온 자료로 알게 됐을 때는 날아갈 듯 기뻤다.

2013년 4월 조선일보에서 조선통신사의 옛길을 걷는 한일 우정워크 기사를 봤다. 매년 개최가 아니라 격년 개최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로부터 2년 기다려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바램이 실현되어 기뻤다. 설레는 마음으로 걸으며 언덕을 넘고 고개를 넘었다. 시내를 횡단하고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일본 땅을 밟았다.

공기가 하와이처럼 깨끗하고 상쾌하다. 황사도 없고 미세한 먼지도 없었다. 하카타(博多)에서 버스를 타고 3일간 달려 오사카에서 내렸다. 히라카타(枚方)에서 쿄토까지의 쿄카이도(京街道)는 보이는 모든 것이 지상낙원 같았다. 저택이 길 양측에 보기 좋게 늘어서 있고, 도로는 바둑판 같았다. 새소리가 들리고 꽃향기가 가득했다.

1607년 5월 조부는 쿄토에서 23일간 체재했다. 그 때 편지를 보냈다. '국서를 누가 받을 것인가'

일본측에서 답이 왔다. '토쿠가와 이야에스(德川家康)공은 모든 직위를 아들에게 물려줬기 때문에 새로운 관백에게 주는 것이 옳다'

주고받기가 시작됐다. '새로운 관백 장군은 나이가 어리지 않은가. 실권은 지금도 이에야스공에게 있으니 이에야스공이 국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명분이 없다. 모든 권력은 새로운 관백에게 있다. 보내온 국서는 새로운 관백이 받아야 한다. 단, 국서 교환 후에 만나자'. '좋다. 그럼 그렇게 하자'.

선조의 편액 앞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2015년 5월16일 오전 세이켄시에 들렀다. 조부의 필담창화 편액 앞에서 내 몸은 얼어붙었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수천, 수만개의 세포가 떨리고 몸에 불이 들어온 것 같았다. 감정은 극도로 흥분됐다.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도취되어 보고 또 보고 꿈인지 현실인지. 스님과 만나 시주를 했다.

"400여년간 소중히 보관하고 유지 관리를 확실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과 악수하고 사진을 찍고, 다시 한 번 삼사의 편액을 잠시 바라보고 세이켄지 뒷뜰을 견학하고 돌아왔다.

5월21일 아침에 일어나자 후지사와(藤澤) 숙소에서 후지산이 보였다. 눈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절경이다.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일본의 절경은 또 하나 있었다. 비와코(琵琶湖)다. 한국에 비와코와 후지산이 없는 것이 아쉽다. 일본은 신이 강림한 축복의 땅이다. 면적은 한반도의 3배, 비와코가 있고 후지산이 있고 홋카이도가 있다.

카케가와(掛川)에서 후지에다(藤枝)를 지났을 때 '카와고에 토진조로이(川越唐人揃い)'의 오가와 미츠루(小川滿) 사무국장이 '청도(淸道)'라고 쓴 깃발을 들고 걸었다. 직역하면 '푸른 길'이다. '길은 파랗다'. 조선통신사가 내건 깃발을 재현한 것이다.

먼지없는 하늘은 아름답고 파랗다. 오염되지 않은 물색은 파랗다. 길은 인간의 도리다. 노자의 도덕경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인간의 도리를 다하자'. 조선통신사는 그 깃발을 내걸고 일본에 왔다. 이야에스공도 그 의미를 받아들였다. 200여년 평화 속에서 우정은 한결같았다.

조선통신사의 옛길을 걷는 한일 우정워크가 더욱 번영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 한일 우정의 횃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르길 기원하며 만날 수 없는 곳에 있어도 계속 응원하겠다.

마지막으로 조선통신사의 문화유산은 유네스코 기억유산에 마땅히 등재되어야 한다. 세계의 역사상으로도 공전절후한 평화의 사절단으로 길을 새로이 만들고, 세계의 역사에는 없는 배로 다리를 만들어 강의 흐름을 많은 사람이 막아 통신사를 건너게 한 사실 등 정말로 위대한 역사였기 때문이다.

여운준(呂運俊, 서울시 송파구 재주. 65세. 전 서울시 직원)

(2015-06-24 민단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