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1-04-02] 조회수 : 1716
동일본 대지진 10년, 서로 도우며 재기의 여정 … 동북3현 민단·동포
[ 미야기현의 홍경임씨와 아이들 ]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10년. 당시 , 민단에서는 피해가 극심했던, 미야기, 이와테, 후쿠시마의 3현을 중심으로, 구호 물자 제공과 피난소의 식사 제공등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10년이 지난 현상황을 3개 지방의 사무국장과 단원들에게 물었다.
【이와테】박명자 씨(79, 이와테현 시모헤이군 야마다마치)는 “정말로 10년 지났군요” 라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지진 재해로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쓰나미로 영업중인던 찻집, 노래방, 부동산등 업장 3곳이 전괴되었다.
가족이 힘을 합쳐 3년 전 레스토랑을 개업. 노래방도 지난해 5월부터 영업을 재개했고 부동산 중개업소도 재건할 수 있었다. 박씨는 “성실하게 노력해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복구·부흥에 대해서는) 아직 도중이라고 생각한다”.
박하박씨(71)는 야마다쵸의 자택과 중화 요리의 점포가 쓰나미에 휩쓸려 갔다. 얼마간은 인접한 미야코쵸에서 소규모로 영업을 하다가, 2년전에 현지의 야마다쵸로 돌아와 중화 요리점 「식도엔」을 신규 오픈했다. 코로나19 시기에 맞춘 가정용 테이크아웃 음식이 호평이다.
“미야코에서는 외지인이라 사소한 일에 트러블이 생겼다. 멘탈이 지쳐서 정신적으로 곤란해졌다. 고향에 돌아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앞으로 5, 6년은 현역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고호영(52·오후나토시) 씨는 쓰나미로 운영하던 야키니쿠점이 전괴되어 그해 12월에 다른 곳에서 영업을 개했다. 지금은 코로나19의 영향이 심각해 테이크 아웃에 의지하고있지만, “개인적으로는 80% 복구되었다고 생각한다”.
매년 6월과 12월의 2회, 재해지를 돌며, 동포의 안부를 확인해 온 민단 이와테 본부의 강영만 사무국장은 재해지의 현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민은 2, 3년전에 가설 주택으로부터 부흥 주택으로 옮겨, 거주지는 안정되고있다. 그렇지만, 마을을 보면 공터가 눈에 띄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민단은 늘 동포들을 잊지 않는다. 여러분 뒤에는 민단이 있다라고 안심할 수 있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고 싶다”.
【후쿠시마】민단 후쿠시마 본부는 10년전의 지진 재해 이래, 정기적으로 단원택에의 가정 방문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된 코로나19 이후에는 단원 집을 방문해 마스크, 소독액 등을 배부하고 있다.
올해 2월 13일에 발생한 후쿠시마 앞바다 지진때는 민단 본부 회관을 비롯해 일부 단원의 가옥과 점포등에서 피해가 발생. 자신이 운영하는 업장의 지붕이 무너진 손철호 단장은 이재민이면서도 지진 다음날부터 전상문 사무국장을 비롯해 사무국 멤버들과 민단 사무실로 총출동해 안부 확인과 피해 가정 방문에 나섰다. 단원들은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 10년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고 했다.
전 국장에 의하면 “물론 모두가 놀랐지만 10년전의 경험이 있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당황하지 않고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평소부터 지진시의 올바른 마음가짐을 몸에 익히고 있는 것 같아, 유연하게 대응할수 있었다”.
10년 전 원전 사고가 있었던 후쿠시마 제1원전 인근에 살던 동포들도 피난 이주한 상태다. 반경 8키로 권 내 나미에에서 피해를 입은 장현숙씨(61)는 미나미소우마시의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있다. 당시 직업은 골프장 캐디였다. 영업 재개 후에 복직했지만, 손님수는 격감해 수입은 반감. 이후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미야기】지진 재해 당시 , 이시노마키시에 살고 있던 홍경임씨는 쓰나미의 피해로 현재는 센다이에 살고 있다. 10년간을 되돌아 보며 민단 미야기현 본부에 수기를 보냈다.
임신중에 찾아온 재해, 남편을 잃고…
소중한 사람(남편)을 잃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9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들이라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살아올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10년 전 '그날' 저는 임신 33주차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임신과는 달리 몸이 무거워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왠지 졸려서 집에 있으면 잠들어서 애들 데리러 못 가겠다' 는 생각에 그냥 장을 보러 나갔어요.
그리고 나서 애들을 데리러 갔어요. 큰 딸을 차에 태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단번에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그때가 2011년 3월 11일 2시 45분, 동일본 대지진 발생. 저는 주위를 살피고 서둘러 어린이집에 갔어요.
둘째 딸과 큰아들도 무사히 보호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아빠는 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저에게 ‘터널 앞으로 피신해라’고 말하고 수문을 닫으러 간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울 틈도 없이 3월 14일에는 자위대 헬기를 타고 대피를 했습니다.
마에야치초등학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부터 카난체육센터로 대피해 4월 11일 아침까지 지냈습니다. 저녁부터는 주센다이 한국총영사관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생활했어요.
이렇게 우리는 수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민단 미야기 본부 분들은 지금도 저희를 염려해서 많이 찾아와주시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인해 1년동안은 완전 자숙, 아이들은 각각 꿈을 향해 공부에 힘쓰고 있습니다. 저는 ‘유비무환’을 명심해 시행 착오를 반복하면서 마스크 만들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저의 소원은 사람들이 상냥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세상을 구할것입니다.